어른이 되기

대충 1년도 안 된 이야기. 내가 한창 구직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모 회사에 리드 디자이너에 지원해서 HR과 통화, 매니저와 1차 면접, 이후 디자인 챌린지 (8시간 짜리) 프로토타입을 포함한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4명과 함께 패널 인터뷰까지. 꽤나 열심히, 그리고 제법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난 그랬다. 이거 안되면 그냥 뭘 해도 안되는거야. 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결과는 놀랍게도 네니오 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Ghosted. 되면 됐다, 안 됐으면 안 됐다 이야기해 주는 게 응당할 것인데, 소문으로만 듣던 Ghosting을 당하니 정말 할 말이 없더라. 연락은 당연히 해 봤다. 이메일, LinkedIn 메시지 전부 다. 읽씹 당했다. 내 시간은? 인터뷰는 그렇다 치고 8시간 디자인 챌린지는 (디자인만 8시간 치고 발표 준비에 덱까지 포함하면…)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너무 속상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리고 이건.. 2년 정도 된 이야기다. 당시 나는 디자인 리드로 디자이너 신규인원 채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꽤나 요란스러웠던 과정에서 (언젠가는 이 부분도 한 번 풀어봐야지) 결국 최종적으로 한 인원을 선별했다. 시에틀에 거주 중인 친구였는데, 인터뷰 모두 잘 해내고 디자인 챌린지도 무던히 해내서 마음에 무척 들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사측에서 모종의 이유로 모든 고용 과정 자체를 중단한다는 것. 이미 축하 이메일까지 보낸 마당에 이런 개탄스러운 상황에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모멸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기뻐할 그 친구에게 오퍼 취소를 한다는 건… 그 친구가 느낄 상실감을 어찌 감히 무마하려 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 하며 무던하려 애썼다. 읽씹은 애초에 내 선택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리하여 최대한 진심을 담아 정성스레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정말 미안하게 됐다. 회사의 상황으로 인해 오퍼 진행이 불가해졌다. – 중략 -‘
그 친구는 답장을 했다. 너무 아쉽지만 어쩌겠냐고. 괜찮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답장을 보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기회가 닿으면 제일 먼저 연락을 주겠다.. – 중략 -‘

그리고 현재. 기회는 그렇게 다가왔다.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그 친구가 떠올랐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나 기억하니, 제이크라고. 혹시 관심 있으면 알려줘. 그 친구가 답장을 했다. 최초 나와 비디오 콜 이후, VP와 함께 디자인 쇼케이스 비디오콜 (이후 VP가 미심쩍어 하길래 질척거렸다), 그리고 내일은 패널 인터뷰이다. 엔지니어들에게도 밑밥 깔아놨으니 아마도 잘 해내겠지. 최대한 내 상식 안에서 배려할 수 있는 최대한을 그녀를 위해 배려했다. 네 디자인 챌린지는 2년 전에 봤으니 너는 안해도 돼. 라는 사족과 함께.

그 친구가 Final offer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는 약속을 지켜냈다.

마음속 수많은 후회의 응어리들 중 그 하나. 2년 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한, 하지만 그렇다 해서 비겁자가 될 수 없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선택.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내겠다는 기억.

난 어른인 척 하는 사람들처럼 상황에 따라 자신의 권위를 챙기고 어려울 때는 침묵하고 눈을 감아버리며 외면해버리는 그런 비겁자로 남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엉터리 오퍼 아님을 미리 말한다. 오퍼 디테일은 이미 내부적으로 협의가 끝났다. 최초 그 친구가 나한테 전달한 연봉 조건에 20% 더 얹어주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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