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2017년에서 2018년 그 사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바라보던 나는 내 자신을 정말 집요할 만큼 객관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그 어떠한 방어기재나 과장되고 부풀림 없이 현재 나의 가치와 능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길 원했다. 그건 자기연민이나 반성과도 같은 그 어떤 고귀한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제의 해결를 위한 첫 시작은 문제의 인식이라는 진리와도 같이, 나는 애써 외면하거나 잊혀진 내 안의 문제의 실체를 확인하길 원했다.
처음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길 원하고 대단해보이길 원하지 않는가. 설령 그러기 위해 자신을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생각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성에 가까운 주관으로 흔들기 쉽고 특히나 그 중에서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는 내 자신에게 만큼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딜레마 없이도 단숨에 설득할 수 있을테니.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의식의 흐름 같은 추상적인 방식 부터 현재 나와 관련된 광범위한 표본들-지역, 나이, 직군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의 분석 등 대조과정을 포함했다. 필연적으로 이 모든 과정은 때때로 자기혐오에 가까운 비판으로 이어졌으며, 또래에 비해 늦은 공부와 이상적인 계발과정을 벗어난 나에게 ‘나라는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비루한 결론만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치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과 같은 끊임없는 밀고 당기는 지루한 전투처럼 생각보다 높은 지구력을 요구했다.
그렇게 내 마음 속 한 공간을 가득 채워놓은, 허울뿐인 근거없는 자신감과 뽀얗게 먼지가 쌓인 허황된 자의식들을 하나 하나 밀어내고 나니 최후에는 저 구석 어딘가에 쭈굴쭈굴해진 탱자마냥 초라한 자존감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나의 부족한 부분들과 문제점들을 찾아내는데 더할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되었고 미숙하게나마 그러한 부분들을 보완할 계획을 세울 초석이 되었다. 그로인해 나는 내 스스로 더 나은 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현실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경주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나보다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과 업무 혹은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와 주었다.
마른 가지를 쳐내고 새로 돋아난 줄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니 나 역시도 그토록 꿈꾸던 숲의 귀퉁이 한 부분이 되어갔다.
마흔이란 나이를 앞두고 나서야 간신히 내 민낯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은 여전히 너무도 민망하고 부끄럽기 매한가지 이지만, 나를 직시할 수 있는 결단이 이제는 나의 감춰진 문제들 뿐만 아니라 나의 진짜 가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앙상한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듯, 눈에 보일 듯 말듯 하지만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